<듀얼 브레인> 이선 몰릭의 AI 시대 협력 지능 가이드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거대한 제국이 들어서며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익숙했던 작은 공동체를 떠나 거대한 도시 속에서 '군중 속의 고독'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혼란의 시기에, 키프로스 섬의 도시 키티온에서 온 철학자 제논(Zeno of Citium, 기원전 334년경 ~ 262년경)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광장 한편에 있던 '알록달록한 주랑(Stoa Poikile)'이라 불리는 공공장소의 기둥 아래에서 사람들과 토론하며 자신의 사상을 나누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감명받은 이들이 모여들며, 장소의 이름을 딴 '스토아 학파'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철학 이론을 넘어,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마음의 지침이 되어주었습니다.
제논이 제시한 스토아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우주를 움직이는 거대한 질서(자연 철학)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윤리학)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설명한 것입니다. 즉,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세상 만물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유물론), 정해진 인과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움직인다(결정론)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 전체를 관통하며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이성적인 원리를 '로고스(Logos)'라고 불렀습니다. 로고스는 신적인 힘이자 자연 그 자체였기에,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이 로고스라는 거대한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인다면, 인간이라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제논은 우리가 시나리오 자체(운명, 외부 사건)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주어진 배역을 받아들이고 훌륭하게 연기하는 '태도'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생각, 판단, 의지뿐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 진정한 평온이 시작된다."
이는 '수레에 묶인 개'의 비유로 잘 설명됩니다. 현명한 개는 수레가 가는 방향을 따라 편안하게 달려가지만, 어리석은 개는 억지로 버티다가 질질 끌려가며 더 큰 고통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즉, 운명에 순응하고 조화롭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사상 위에서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최고의 '덕(Virtue)'은 부나 명예가 아닌,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아파테이아, Apatheia)' 그 자체였습니다. 불필요한 슬픔, 두려움, 질투와 같은 격정적인 감정(정념)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 판단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키티온의 제논이 창시한 스토아 철학은 20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과 수많은 정보 속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그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선사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오롯이 나의 생각과 태도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는 마음챙김(Mindfulness)과 같은 현대 심리학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제논의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시련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단단한 내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